Apr
21
9:00 AM09:00

초막절의 주인이시고 중심이신 예수님

요한복음(John) 7:1~24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6명 이상의 동생들은 형님(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쪽 유대인들의 살인의 위협을 피해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형님(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번 초막절에 유대로 올라가서 수 많은 순례자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기적을 나타내시면 그렇게 원하던 하나님의 나라가 쉽고 빠르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동생들끼리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혼자 아무도 모르게 올라갔고 사람을 피해서 조용히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시면서 가르쳤습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목숨을 걸고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갔고 사람들을 가르쳤을까요?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초막절의 참 주인이요 완성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께서 맡기신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위험한 행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이름과 명예를 드러내는 일은 거절하셨지만 하나님이 부탁하신 일은 목숨을 걸고 임하신다는 것을 다시 알게되었습니다. 한 주간도 하나님의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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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4
9:30 AM09:30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주님을 믿는 것

요한복음(John) 6:41~59

유대인들은 모세율법이 시작되고 약 삼천오백년이 지난 오늘날도 음식법(Kosher)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음식법은 주로 피에 관련된 것이며 피는 생명이므로 피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충격적이고 혐오스럽 표현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당신을 믿고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너무 중요했기에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곧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흘려 죽으실 것입니다. 이 십자가 구원의 사실을 오병이어 표적으로 보여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이런 주님의 표적과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고 주님이 이 번에는 충격적인 표현을 하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실제로 인육을 먹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주간도 이렇게 간절히 성도와 하나되기를 원하고 십자가의 구원을 믿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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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7
1:00 AM01:00

하나님의 일

요한복음(John) 6:22~40

오병이어 표적과 같은 엄청난 사건을 경험한 군중들은 쉽게 예수님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피해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보내셨지만 군중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까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인간적으로보면 그들의 열심을 칭찬해줄 수 있겠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냉정하게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찾아온 군중들과 예수님과의 질문과 대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핵심은 명료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체의 떡의 문제를 해결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 당신을 먹는 자에게(믿는자)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이 너무 중요 했기에 71절이라는 긴 내용을 할애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간도 생명의 떡되신 주님을 매일 삶에서 말씀 가운데 먹고 묵상하는 시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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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31
4:30 AM04:30

나는 정말 부활을 믿는가?

요한복음(John) 11:25~26

교회에서 정상적으로 믿음 생활을 해오신 분들은 부활의 미래성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마지막 재림의 날에 무덤에 있는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여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고 예수를 부인했던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살아가면서 알아야하는 부활의 현재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합니다. 요11장에서 주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키기 전에  분명 현재형으로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은 장차 십자가에 달려 죽기 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인격적으로 믿으면  현재 그 사람 안에 부활의 씨가  있게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현재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는 사망의 쏘는 것 즉, 죄와 율법으로부터 눌리지 않습니다. 사탄이 주관하는 독한 사망과 죄의 화살이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 내 안에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현재를 알고 누리고 승리하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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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3
9:30 PM21:30

역설적인 왕의 입성

요한복음(John) 12:12~19

동화나 만화에서 가끔 등장하는 나귀는 현대인들에게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주인의 말을 무시하는 어리석고 고집불통의 이미지로 등장하곤합니다. 그러나 고대에서 나귀는 겸손과 평화의 이미지를 가진 존귀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을 따라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말이 아닌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한 번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왕으로 군림하셔서 강력한 통치를 원하셨다면 멋진 말을 타고 나타나셨을 겁니다. 오늘 평화의 왕으로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섬기기 원하셨던 주님을 두 손 들어 환영합시다. 동시에 그 평강의 왕과 함께 골고다까지 동행하며 그를 전하며 증거합시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고난주간에 가져할 성도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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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7
9:00 AM09:00

두 표적의 관계

요한복음(John) 6:16~21

예수님께서 폭풍 중에 있는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물위를 걸어오신 표적은 오병이어 표적과 연관성이 있어 그 선상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오병이어 사건 한 가운데 이 표적을 삽입하여 기록했습니다. 오병이어를 통하여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이시며 참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말했고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동시에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을 통하여 주님 당신은 자연의 질서를 세우셨고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의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말해주었습니다. 이 두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찾아오시고 돌아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번 주간도 이 하나님을 만나고 묵상하는 성도님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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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0
9:30 AM09:30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요한복음(John) 6:1~15

신약성경에서 '오병이어' 기적은 사복음서 기자가 모두 언급할 정도로 의미있고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이 표적을 어린이가 도시락 바친  헌신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어린아이처럼 자기의 전부를 드려서 주님의 큰 축복과 기적을 맛보자는 식의 결론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도 도시락을 드린 어린이를 칭찬하거나 아이처럼 가진 것 모두를 헌신하여 기적을 경험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표적을 기록한 목적은 명확합니다. 장차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사건이지 헌신을 강조하여 교회건축이나 교육관 건립에 헌신하자는 식의 동원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주간동안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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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
to Mar 3

예수님의 정체성

요한복음(John) 5:19~30

자비의 연못가에 자비만을 기다리며 38년 된 병자는 누워있지만 아무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구원의 양문 곁에 있지만 구원은 그와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병자를 주님이 찾아오셨고 그의 중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병자를 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죽음으로 협박을 해와도 흔들림이 없습니다.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병을 고치시고 가르친다고 하셨니다. 또한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부활의 능력과 최후 심판의 권한을 이양받아 재림의 날에 재판장으로 설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당신의 이 선포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유효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말씀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선포를 기억합시다. 당신은 분명 하나님과 하나이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을 주시며 최후 심판에서 재판장으로 오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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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5
12:00 AM00:00

예수님의 자비와 권세

요한복음(John) 5:1-18

오늘 함께 살펴볼 38년 된 병자는 자비의 연못이라는 베데스다 연못 곁에서 광천수가 터지기만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연못에는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고침 받는다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더욱 그를 절망케하는 것은 아직 한 번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과 소문조차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병자는 자비의 연못 곁에 누워서 어떤 자비도 기대하지 못한채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 병자는 실제로 예수님으로부터 나음을 받고 난 후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믿음도 감사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신고해 버려 예수님의 핍박과 논쟁이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병자를 찾으셨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38년 동안 그를 괴롭힌 병에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자격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고쳐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오늘도 바라보면서 한 주를 살아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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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17
to Feb 18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요한복음(John) 4:43~54

요즘과 같이 정치와 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불안하면 무당들이 호황을 누립니다. 미국 한인사회에서 버젖이 자리잡고 있는 무당과 무속 신앙의 핵심은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신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이나 능력으로 신을 달래고 얼러 자신에게 미칠 액운을 면하거나 자기 소원을 성취하려는 것이 무속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굿을 수백 번 하고 우상에게 수천 번 절을 한다 한들 무속 신앙으로는 사람이 거룩하게 변화될 수 없습니다.  반면 기독교 신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거듭나고 변화되려는 데에 그 요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뜻을 성취하려는 것이 이니라, 도리어 자신의 뜻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자기 삶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적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큰 질병이나 재난 앞에서 성도는 무속 신앙을 가졌는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가졌는지 극명히 판가름납니다. 요4장 왕의 신하의 사건에서 주님은 무속 신앙과 같은 믿음을 가진 신하를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로 변화시켜주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를 진정한 믿음의 제자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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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11
11:30 AM11:30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 II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중에서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사마리아의 산에서 드리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를 물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사마리아도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더이상 예배는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히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때와 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시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의미는 '진리의 성령'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님께 새로운 방법으로 예배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로 성도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새로운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진리의 성령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도 직장에서 가정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진리의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충만한 예배를 드리고 경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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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4
9:00 AM09:00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

요한복음(John) 4:1~26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례사역을 잘 해나가고 있을 때 그 일을 멈추고 다시 갈릴리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십니다. 세례요한과의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금했기 때문에 그 땅을 밟지않고 우회해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산간 지역인 사마리아 근처에 많은 강도들이 출몰하여 위협했고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사마리아행을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만일 주님이 여인을 찾지 않는다면 여인은 스스로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수가성 여인과 같은 우리 인생을 찾으시고 그 영원한 생수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 번주에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되신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성도님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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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8
9:00 AM09:00

세례요한처럼

요한복음(John) 3:22-36

'경쟁자'라는 말이 영어로 'rival'(라이벌)이라는 말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rival이라는 말은 'river'(강)이라는 단어와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로써 경쟁자란 본래 서로 같은 강물을 마시는 사이임을 알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마을에서 다른 강물을 마시고 사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은 라이벌이 될 까닭도 이유도 없습니다. 라이벌은 언제나 같은 강가, 이를테면 동일 분야나 동일 업종에서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례요한 역시 나사렛 출신 예수님과 같은 요단강 지류에서 세례를 주는 사역의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경쟁관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메시아이시며 요한 자신은 그의 길을 비추는 조연이며 신발끈을 묶는 것도 어려운 자라고 고백합니다. 메시아 앞에서 겸손한 세례요한의 이 모습을 배우고 깊이 생각하는 한 주가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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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1
9:30 AM09:30

결국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고 말았다

요한복음(John) 3:9~21

요한복음 3장 16절은 신구약 성경을 한 줄로 압축해 놓은 구절이며 복음의 진수를 자연스럽게 녹여놓은 말씀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선교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번역하고 가르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시고 계신 분들이라면 암송하지 않을 수 없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성경 말씀이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당시 니고데모는 완벽한 유대교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완벽한 율법 준수와 조상들의 유전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던 종교인입니다. 그런 외형적 종교인에게 주님은 요3:16절의 말씀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시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을 처음 믿은 초신자보다는 기존의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서 큰 직분으로 활동하고 섬기는 중직자들에게 먼저 적용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 주간도 니고데모의 마음을 두르리신 주님이 우리 성도님의 마음을 두드리고 도전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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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14
8:00 AM08:00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

요한복음(John) 3:1~15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는 없는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3번이나 등장합니다. 단순히 3장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 예수님을 만나 논쟁했으나  7장에서는 예수님을 위해서 변호했고 심지어 19장에서는 처형되신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는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과의 만남을 밝히지 못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믿음은 깊어지고 마지막에는 자기 인생이 모든 것을 걸고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며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밝혔습니다. 니고데모는 정복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졌고 구리온 가문의 혈통을(하스모니안 시대 전쟁 영웅의 가문) 소유했고 바리새인으로 학문과 연구 그리고 절처한 율법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중요직책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완벽한 유대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정확히 들었습니다. 그 만남과 그 말씀이 니고데모 안에 거함으로 서서히 그를 변화시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번 주는 더 예수님과 만나고 교제하고 생명의 말씀에 더 집중하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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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7
8:00 AM08:00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

로마서(Romans) 13:11~14

2024년이 새롭게 밝았습니다. 올 해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라는 주제로 성도님들과 같이 이 순례의 길을 달리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 전에 먼저 벗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두움의 일들에 관한 것으로 방탕함과 술취함 그리고 음란과 호색과 다툼과 시기를 먼저 버리고 예수로 옷을 입으라 합니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으로 옷을 입는 것은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갈3:27) 이 연합과 세례가 우리에게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옷을 입은 것입니다. 옷은 그 사람의 격조와 수준 그리고 정체성과 임무를 나타냅니다. 올 해는 그리스도로 옷입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분의 수준과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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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31
10:30 AM10:30

절대적이고 익숙한 것들로부터 이별

요한복음(John) 2:13-25

2023년의 마지막날이며 마지막 예배가 있는 날에 생각해 볼 것은 '가장 익숙한 것들'로부터 이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과 제사만큼 절대적이고 익숙한 존재는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두에 성전의 시대와 제사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포하는 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예수님의 '성전 청소'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순례객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유월절에 성전에 들어오셔서 채찍으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참 성전이시며 참 제물이신 예수님이 오셨기에 구약의 그 성전과 제사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되었습니다. 동시에 이제는 그 익숙한 것들로부터 작별을 해야한다는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동안 성전으로 인하여 부를 축적하고 밥벌이를 했던 제사장들과 그 하수인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고 충격 그 자체였지만, 이미 새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기에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익숙한 옛 것은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 성전이신 주님과 함께 달리는 새로운 한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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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3
10:00 PM22:00

기다림… 다시 오실 예수님

누가복음(Luke) 2:1-20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면서 복음서를 적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선물을 받는 장면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마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시각으로 적어가며 예수님의 족보를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보통 유대문화에서 족보를 통하여 누구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력서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덕이 되는 좋은 이야기만 적게됩니다. 그러나 마태는 달랐습니다. 족보를 통하여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조상 중에서 수치스러운 조상들의 이름을 족보에 의도적으로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부 다말과 동침하여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기에 이것은 엄연한 근친상간의 사건입니다. 또 라합은 가나안 이방인 여인으로 매춘부였고 다윗 왕 조차도 자기 충신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적었습니다. 이렇게 간음과 근친상간과 매춘을 했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부정한 부류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조상으로 공공연하게 인정하며 올렸습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탄절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구원입니다. 그 예수님의 구원이 있기에 성탄은 기쁨의 날이 되고 행복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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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6
10:30 PM22:30

견고한 소망

고린도후서(2 Corinthians) 1:1~11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700년 전 미가의 예언이(미5:2)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시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북쪽 갈릴리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1주일을 걸어야 갈 수 있는 남쪽 베들레헴에(150Km) 가서 아기를 낳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거부할 수 없는 로마황제의 호적칙령 때문이었습니다. 반드시 로마제국에 속한 남자들은 본적지에 가서 호적동록을 해야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로마황제와 헤롯왕의 정치적인 이유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둘의 정치관계는 완전 좋았다가도 서먹한 그런 관계였습니다. 실제로 황제의 호적칙령은 주전 8세기에 내려졌지만, 헤롯왕의 거부로 즉시 시행되지 않고 보류시킵니다. 바로 그 때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이 두 왕의 관계를 푸시고 명령이 시행되게 하셨고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헤험으로 보내시고 아기를 낳게 하십니다. 바로 그 곳 베들레헴에서 700년 전의 예언대로 메시아가 태어나게합니다. 이 번 주간도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묵상하고 찬양하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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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9
8:00 AM08:00

어머니 마리아의 영성

요한복음(John) 2:12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리아는 어린 아이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탁월한 영성을 가졌고  정신과 육체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들의 예언을 통한 하나님이 뜻이 전달되었을 때에  즉시 순종했으며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유다까지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서 그 길을 여행했고 황제의 호적 명령을 위해서 만삭의 몸으로 그 여행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헤롯왕을 피하여 이집트까지 여행하고 돌아옵니다.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예언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가나의 첫 표적을 통하여 자신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아들 가진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마리아도 이 위대한 아들을 곁에두고 싶었고 자랑하고 싶었고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아들을 축복하며 보내어 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부모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가난하고 학식이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깊은 영성을 가졌고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소유했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아보는 지혜가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성탄을 기다리면서 어머니 마리아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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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
10:00 PM22:00

가나의 표적을 통한 메시지

요한복음(John) 2:1~12

가나 혼인잔치의 표적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적사건입니다. 이 표적사건은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있는 사건으로도 유명합니다. 요한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 사건을 첫 표적으로 올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 여기에는 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사역을 시작하면서 이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당신이 표적을 통하여 큰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자신을 드러내어 주목과 갈채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드러내길 원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이 친히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에 고통당하고 죽으셨던 그 영광이었습니다. 이 번 주도 그 영광에 함께 동참하는 저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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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6
6:00 AM06:00

학생이 아닌 제자를 부르시는 주님

요한복음(John) 1:35-51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나토 사령관을 역임했던 헤이그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여 헤이그는 레이건에 의해서 해임되고 불명예 퇴직을 하게 됩니다. 레이건은 취임 후 두 달만에 힝클리라는 정신병자에게 저격을 당합니다. 그는 즉각 병원에 옮겼지만, 고령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상태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 했습니다. 그 때 헤이그 국무장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외신 기자를 불러 회견을 열었고, 자신이 미국의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밝혔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헌법은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며, 부통령마저 유고일 때는 하원의장이 그 권한을 승계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헤프닝은  슐츠 국무장관이 새롭게 발탁되는 계기가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자리를 분별치 못하는 자는 주위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자기의 자리를 정확히 지키고 역할을 다했던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고  그를 정확히 가르키고 비추었던 세례요한입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생활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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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12
9:00 AM09:00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기

요한복음(John) 1:6~18

이 천년 전 로마제국에서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을(파트리아 포스테타트)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노예로 팔기도하고 쇠사슬에 묶어 노동도 시키고 심지어 때려서 사망케하는 경우에도 법에 저촉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당시의 문화에서 그 누구를 입양하여 양자로 삼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절대적인 부권으로부터 그 아이을 옮겨와야했습니다. 보통 입양 절차에는 '만키파치오'라는 상징적인 매매를 해야했습니다. 입양할 사람은 아이를  그 아버지에게서 3번 사와야 했습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입양관계가 값을 치른 행위임을 명백히 했습니다. 이렇게 값을 치렀다는 것은 그 절대적인 부권에서 자란 과거와 채무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벗어났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양자된 것은 예수님의 만키파치오에 의해서 이뤄진 것입니다. 에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생명으로 사셔서 죄악된 과거를 완전히 소멸시켰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라는 말 안에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있음을 기억합시다. 이 번 주는 양자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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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4
10:00 PM22:00

말씀이시며 창조주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

요한복음(John) 1:1~5

사도요한이 그의 대표작 요한복음을 기록했을 때는 고령이었고(90세) 이미 세 권의 공관복음이(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중심으로 출간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이 책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에 분명히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요20:30-31) 이렇게 요한이 유독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했던 이유는 당시의 이단(영지주의) 때문입니다. 당시 영지주의는 선하신 하나님이 악한 육체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수가 없다고 주장하며 교회를 미혹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분명히 경고하면서 동시에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고스(말씀)이며 완전한 참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시며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이 번주 부터 요한복음을 같이 살펴보면서 그 예수님에 대해서 같이 묵상하고 더 깊이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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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28
10:30 PM22:30

나는 육체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1 Corinthians) 15:50-53

성경은 주님의 재림 때에 홀연히 죽은 자들이 썩어 없어지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도 그렇게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15:52) 육체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부활하신 육체의 몸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부활체는 예전 육체의 연속성과 비 연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신비한 상태였습니다. 예전처럼 같이 식사를 하셨고 십자가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계셔서 도마에게 직접 만져 확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의 육체와 똑같지는 않았습니다. 부활체를 가지셨지만 벽을 통과하여 집 안으로 들어오셨고 순간적으로 눈에서 사라지기도 하셨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열매인 성도들도 재림 때에 그런 부활체를 가질 것입니다. 부활의 육체를 가졌지만 예전 육체의 모습과는 다른 육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영원히 생명을 나누는 그런 부활체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마지막 고백에서는 그 신령한 부활의 육체를 입게될 것을 믿고 고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 주간도 육체의 부활을 믿고 영원히 영생을 것을 믿고 기대하며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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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22
8:30 AM08:30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

마태복음(Matthew) 6:12.

  사도신경에서 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용서함을 받았다고 믿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용서라는 주제를 비유를 통하여 많이 전하셨습니다. 일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비유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용서라는 주제를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역을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용서는 복음의 중요한 핵심 주제이며 십자가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용서는 교회의 작동원리와 교회의 영성의 바탕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우리들의 존재가 용서받은 존재로 세워졌음을 기억하고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며 승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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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5
12:30 AM00:30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하심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1 Corinthians) 1:1~3

주님이 세우신 교회는 건물이자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으로 오해하십니다. 진실로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헬라어 원어를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교회라는 말 즉, '에클레시아'는 '에크(무엇으로부터)와 '레시아'(불러내다의 수동태)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죄와 어둠과 그리고 죽음으로 부터 불러냄을 받은 존재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중국성경을 참고하면서 '교회'로 번역되었습니다.(가르치다의 '교(敎)'와 모이다의 '회(會)'를 사용) 좋은 번역이었지만 완벽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적인 유교사상 하에서 번역 된것이 아쉽습니다. 만일 외래어로 그냥 '에클레시아'라고 표기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죽음과 저주에서 주님이 핏 값으로 사신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한 주간도 교회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묵상해보는 주간이 되길 소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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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7
9:00 AM09:00

성령을 믿사오며

요한복음(John) 16:13~14

  “성령님을 믿고 따라간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5장 25절의 말씀대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여기서 '성령으로 행하다'의  뜻은 단순히 행동하고 움직인다는 doing 의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 단어를 '스토이케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줄지어 따라간다’의 뜻입니며 군인들이 행진할 때 사용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가끔씩 어린 오리 새끼가 줄을 지어 맹렬하게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미가 절벽에 오르면 같이 오르고 뛰어내리면 서슴없이 뛰어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고 성령을 따라 사는 모습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중심으로 일을 진행 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세상은 그런 성향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독립성이 강하고 자립적이고 추진력이 뛰어나다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 인도받는 성도는 추진하기 전에 먼저 성령님께 의논하고 지도를 구하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후에 일하고 움직이고 추진해도 늦지 않습니다. 한 주간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인정하며 성령으로 행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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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
11:00 AM11:00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태복음(Matthew) 24:32~44

주님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방주의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일상에 집중하고 살았습니다. 방주작업이라는 고된 노역을위해서 잘먹고 잘 마셔야 했고 자녀들도 결혼도해서 며느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노아 가족도 세상사람들과 다름 없이 평범한 일상을 열심히 살았던 것입습니다. 주님의 재림 때에 당신을 만났던 자들도 평범하게 일상을 살았던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맷돌을 돌리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들이 특별한 수도원에서 금욕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범한 일상을 살았지만 방주를 지어야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사역이 늘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한 주간의 평범한 일상을 살면서 늘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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