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Sunday Sermon) — https://gkchurch.squarespace.com/home

Mar
29
7:30 AM07:30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

로마서(Romans) 5:12~21

동서를 막론하고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프로이드와 막스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여 사람의 정신 영역이 얼마나 넓고 가능성이 있는가를 알려준 업적이 있었습니다. 또 막스는 공산주의 창시자로 지금까지 권력의 피지배 계층을(프롤레타리아) 새로운 권력의 창출자요 보았던 점이 큰 공헌을 한 이유라고 합니다. 오늘 롬 5:12-21에 인류의 영적 세계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첫 번째 아담으로' 그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오고 죄로 인하여 결국 사망이 온 인류 안으로 들어와 사망아래 놓이게 한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죄와 사망으로 멸망하게된 인간을 화해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 아들입니다. 성도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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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22
6:30 AM06:30

구원받은 자의 다음 단계

로마서(Romans) 5:1~11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될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 대답이 5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먼저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들과도 화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것으로 이웃과도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구원자는 환난 중에 낙심하지 않고 소망으로 즐거워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오히려 환난을 즐거워하며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인내와 연단을 만들어내어 참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도 구원받은 자로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하며 삽시다. 환난이 오더라도 그 고통을 즐거워하며 자랑합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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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5
8:30 PM20:30

구원의 기준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II

로마서(Romans) 4:13~25

롬4장에서 바울께서 말씀하는 믿음은 막연하고 맹목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믿음이고 그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는데,맹목적인 신념만 가지고 노력하고 행동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신념이고 적극적 사고 방식일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 사도께서 말하는 믿음은 일반 상식적인 확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정해진 시간에 안전하게 도착할 것이라는 99%의 가능성을 믿기에 안심하고 비행기를 탑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이런 기술과 경험 그리고 상식과 지식을 초월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께서 말씀하사는 믿음은 입으로만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헌신과 행동을 수반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참 맏음에는 약속이 있고 확률적인 지식을 넘어서고 헌신하고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이 번 주간은 내가 과연 무엇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한 주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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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8
1:30 PM13:30

구원의 기준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로마서(Romans) 4:1~12

16세기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부패한 로마카톨릭의 신앙은 행함과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사상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 뿐 아니라,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내던 그 시절에도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진리는 이해할 수 없는 궤변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특히 율법의 열심으로 평생을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그 믿음의 논리는 정말 혐오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율법의 행위와 노력으로 할례받은 자들만이 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생명처럼 율법을 준수해 왔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도 율법의 열심이 아닌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롬4) 이렇게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사상은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먼저 고안한 말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 말씀에 율법과 할례가 주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율법없이 할례없이 아브라함을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열심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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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
8:30 AM08:30

구원받은 성도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로마서(Romans) 3:27~3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있는 인간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그러나 이제는'는 이라는 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반전을 이야기 합니다.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의 즉, 구원이 펼쳐질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 삼으시고 그 피로 당신을 의롭게 드러내시고 동시에 그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의롭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하였습니다. 죄있는 자를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용서받고(용납) 구원받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여기에서 바울을 구원받은 자가 하지말아야 할 것을 언급합니다. 먼저는 자기 자랑하지 않는 것이고 남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울법을 파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믿움으로 서로 세워주고 차별하지 않으며 율법의 선한 뜻을 알고 지켜나갑니다 한 주간도 예수 믿는 성도로서 이 3가지 적용을 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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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2
7:30 PM19:30

그러나 이제는

로마서(Romans) 3:21~26

오늘 함께 살펴볼 롬3:21-31절의 말씀은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강조하시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롬1:18-20절에서 바울사도는 헬라인이나 유대인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그 죄를 고소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반전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바울께서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포합니다. 이 의는 인간이 노력해서 획득되어지는 의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크고 강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은 것 같지만 그 믿음은 주님께로부터 선물로 내게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온 선물인 이 믿음이 복음의 출발입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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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15
10:30 PM22:30

유대인의 반문

로마서(Romans) 3:1~20

바울신학 연구로 유명한 영국 신약학자 톰 라이트라가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라는 부분을 이렇게 예화를 들면서 설명했습니다. 그가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나려하는데, 영국의 친한 친구가 뉴질랜드에 있는 가족에서 선물을(고가의 보석 목걸이) 전해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선뜻 하락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 선물이 고가의 목걸이였고 분실했을 경우에 보상해할 부담이 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친구의 부탁을 수락했고 보석을 가져가서 무사히 전달해 주었다고합니다. 그는 말씀을 맡은 유대인이 자기와 같은 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선물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역할은 말씀의 소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미 신앙생활을 수 십년간 해왔고 선조때부터 예수를 3-4대째 믿어왔고 교회 안에서 중요 직분을 맡았다면, 그분은 말씀을 먼저 맡은 성도에 매우 가깝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을 먼저 맡은 성도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말씀의 소유를 주장하기 보다 말씀을 나누고 전하는 통로의 삶을 사는 것이 맞을겁니다. 한 주간도 맡은 말씀을 어떻게 나누고 전할지를 생각하고 또 실천하는 성도님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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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9
12:30 AM00:30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

로마서(Romans) 2:17~29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셨던 주님께서 강력하게 정죄하시고 저주를 선포하셨던 부류가 있었습니다. 바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율법을 연구했고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저주받을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위선'(히파크러스)이라는 단어는 헬라문화권에서 사용된 말로, 말과 행동이 분리된 연극(심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과 행동이 달랐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하여 위선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본문에서도 이런 위선자들이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은 가르치지만 자신을 가르치지 않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나 자기는 도둑질하고, 간음하지 말라 말하지만 자기는 간음했던 유대인들 말입니다. 바울사도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음을 강력한 지적하며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선언합니다. 바울의 이 경고의 말씀은 당시 유대인 뿐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예수를 믿어왔고 큰 직분을 가진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 주간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의 일치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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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1
6:00 PM18:00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로마서(Romans) 2:1~16

사람들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야박하고 비판적입니다. 남이 자기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면 완고한 것이고 내가 그러면 심지가 굳은 것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지출을 많이하면 씀씀이가 헤픈 것이고 내가 지출이 많으면 통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잘못을 지적하면 비판적인 것이고 내가 비판하면 예리한 것입니다. 남이 잘 차려입으면 허영심이 강한 것이고 내가 그러면 패션감각이 뛰어난 것입니다. 남이 위험을 감수하면 무모한 것이고 내가 위험에 뛰어들면 용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유대인들은 특별히 더 교만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두 손들어 환영하며 인정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동일한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언제나 공정한 심판을 하십니다. 이 공의로운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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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5
9:00 PM21:00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사람들의 불의

로마서(Romans) 1:18-32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라는 것입니다.(롬1:7) 그리고 1:17절 안에서 핵심구절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동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가 가장 잘 드러났던 곳이 구약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킬 때 당신의 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든 구약의 언약이 가르키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이 십자가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의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것을 신실하게 지킴으로 의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신실한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의는 오직 인간의 노력과 행위가 아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도 이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며 배우고 실천하는 성도님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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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18
10:00 PM22:00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II

로마서(Romans) 1:16~17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고 믿음을 가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셨던 하나님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안 믿겠다고 하면 하나님의 믿음(신실함)이 폐하여 지는가? 그럴수 없다는 것입니다.(롬3:3) 이것은 하나님도 성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땅의 자녀들이 죄사함받고 돌아와 새생명을 누리고 회복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인간들의 아무리 하나님의 믿음을 부정하여도 그 믿음은 폐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견고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신실했기에 여기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견인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번주도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당신의 믿음에 감사하며 바라보는 주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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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11
8:30 PM20:30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로마서(Romans) 1:8~17

바울 사도께서는 롬1:14절에서 당신은 그리스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빚을 지다는 의미는 직접적으로 누구에게 돈을 빌려 빚을 졌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간접적으로 빚을 진 경우입니다. 가령, 가까운 친구가 그의 동생에게 1만불을 전해달라고 내게 주었다면, 나는 그 1만불을 그 동생에게 줄 때까지 그 친구에게 빚을 지게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빚진자의 개념은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바울에게 주면서 모든 민족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면, 복음을 받은 바울이 이 복음을 전하여 줄 때까지 하나님께 빚진자가 되었기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빚진 자의 의미는 바울뿐 아니라, 복음을 먼저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이 번 한 주간도 복음의 빚진자의 맘으로 복음을 전하고 소개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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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4
to Jan 5

바울의 인사

로마서(Romans) 1:1~17

복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말로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주로 정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의 황제가 지고 다음 황제가 오실 것이며 새 황제의 시민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 그 새로운 황제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며 증거했습니다. 성도님들에게 가장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인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 복음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제법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이 복음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복음 없는 종교적 삶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삶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다시 복음을 들으며 복음을 바라보고 복음을 환영하며 그 앞에 서야합니다. 2025년 한 해도 다시 복음 앞에 서는 간절한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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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8
8:30 AM08:30

능력이 아니라 사랑

요한복음(John) 21:18-25

요한복음을 1년 넘게 살펴보면서 어떤 부분이 기억에 남아있습니까? 저자는 사도요한은 책의 기록 목적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임을 믿게하고 그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20:31) 또한 그는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며 하나님 그 자체라고 선언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포도나무라고도 했습니다. 당시 이 책의 수신자 였던 유대인 크리스챤에게 이런 표현은 충격적이었지만 요한은 돌이킬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목적과 예수님의 믿음의 결과와 신성에 대해 정확히 말함으로 장차 사도행전 시대를 살아가야 할 유대인 성도들에게 큰 도전과 용기를 주었고 동시에 은혜와 감격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기준과 방법이 지혜로운 감각있는 적응력과 사회적 관계라고 말들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이고 참 제자라면 오직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이 진정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이고 해결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한 주를 살아내는 성도님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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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1
8:00 PM20:00

메시야가 원했던 사람들

누가복음(Luke) 2:1~20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만나고 경배했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족이나 종교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경제적으로 최하층에 머물고 종교적으로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던 들판의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천군 천사 오케스트라를 보내주시고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탄생 본질 그리고 태어난 정보를 주면서 메시아를 만나보고 첫 경배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하심은 인간이 누릴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습니다. 동시에 이 만남과 경배는 장차 메시아가 이 땅에서 만나야 할 첫 대상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강력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정 메시아는 이 땅에서 가장 소외되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구주가 되시려 오셨습니다. 이 성탄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성도가 됩시다. 비록 불안 위치에서 힘겹게 살고 가진 것은 없지만 속한 그 자리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경배하려는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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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5
8:00 AM08:00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회복

요한복음(John) 21:1~14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장면은 다소 오해가  있어왔습니다.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당신이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고 그 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이 부활하시고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시고 베드로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신 말씀도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그 약속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멋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갈릴리는 자신들이 자라온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곳 사람들에게 더이상 자신을 감출 수 없었고 그들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가릴 수 없는 이 현장에서 예수님을 주로 바로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증인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향에 먼저 도착한 제자들은 주님을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리지 못했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며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인내하지 못하고 배를 타고 조업을 나갔습니다. 약속을 망각한 그런 제자들을 주님은 질책하지 않으시고 숯불을 피우시고 떡과 생선을 준비하여 섬겼습니다. 다시 사명을 상기시켰고 사도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번 주간 주님은 갈릴리의 그 약속을 그 만남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활 후의 약속을 기억하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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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8
9:30 AM09:30

도마의 위대한 고백

요한복음(John) 20:24~29

요한복음 가운데 완벽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단연 도마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라"라는 고백입니다. 사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의 예언 말씀을 믿지도 않았고 부활에 대한 동료 제자들의 증언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못자국을 보며 손 가락을 못자국에 넣어보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조건적인 믿음도 이해해주시며 도마에게 부활한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주님은 개인적으로 도마를 배려하셔서 무려 8일을 기다려 다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지극한 주님의 사랑과 배려는 결국 요한복음의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을 탄생하게 했던 것입니다. 납득이 되어야만 믿겠다는 도마의 이기적이고 교만한 신앙은 주님에 의해 변화되고 가장 뜨겁게 전도자로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도마는 주님의 복음을 가장 먼 변방 남인도 체나이까지 전했고 그 곳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까지(삼국시대) 영주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부활의 변화와 능력이 이 번 주간도 내 삶 가운데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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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30
9:30 PM21:30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

요한복음(John) 19:17~37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행동과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실 주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이 끝까지 아무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것이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즉,예언을 성취하시며 그 길을 가셨습니다. 타는 갈증 속에서 "내가 목 마르다"라고 하시면서 드실 수 없는 신포주를 취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시 69:21절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주변의 모든 행동들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기로 취하는 로마군사의 행동에서도 시22:18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보게 되고 예수님의 다리를 꺽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로마병사의 행동 역시 출12:46절과 슥12:10절의 말씀을 성취하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에 주님이 순종하며 성령님은 그 모든 십자가의 진행을 주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은 철저히 서로를 존중하고 보완하며 연합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메시지이며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살아낼 목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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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3
9:00 PM21:00

추수감사주일에 무엇을 드릴까

요한복음(John) 19:31-42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당신의 시신을 거두어야 하는 상황에서 선듯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관례법으로 그의 시신은 가족묘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죄인들의 시신들이 던져지는 공동묘지로 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절박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드려 주님의 시신을 총독에게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12제자들이나 친형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율법학자였고 랍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평생 쌓았던 직위와 명예 그리고 물질(새무덤과 향품과 세마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이었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베풀어주신 주님의 그 은혜에 전부를 드림으로 화답하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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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16
to Nov 17

영원하신 왕의 모욕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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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John) 19:1~16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서 '자리에 앉는다'는 헬라어 동사 'kathizo'는 자동사인 동시에 타동사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를 자동사로 보면 빌라도 스스로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하여 스스로 재판석에 앉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타동사로 간주할 때는 빌라도 자신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재판석에 앉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동사로 사용해야 정확한 의미가 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후자라고 확신합니다. 빌라도가 최후의 선고를 내리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겉으로보면  바로 자기 자리였고 그 자리에서 어떤 선고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주님의 재판석 앞에 자신을 앉혀 두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움받은 영원한 재판장이십니다. 영원전부터 지금현재 그리고 최후 심판의 날에도 재판장으로 심판 하실겁니다. 이렇게 빌라도의 재판은 가짜 재판장인 빌라도가 진짜 재판장인 예수님을 드러내게하는 재판입니다. 이 영원한 재판장 예수 그리스도를 한 주간도 묵상하고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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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10
8:30 AM08:30

대제사장의 심문과 빌라도의 판결

요한복음(John) 18:19~19:16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로부터 유대를 다스리도록 명령받았던 총독 빌라도는(AD 26-36년)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여 황제와 유대백성 모두에게 크게 신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초상을 새긴 깃발과 방패를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였다가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예루살렘 수도사업을 명목으로 성전의 재정을 착복하는 바람에 큰 민중봉기를 두 번이나 겪어야했습니다. 당시 팍스 로마를 지향하던 황제는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대단히 경계했고 이것은 곧 총독의 무능함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민심에 민감했고 여론을 주도하는 종교지도자들의 눈치를 많이 보게되었습니다. 빌라도가 분명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도 십자가 판결을 내렸던 것은 정치적인 약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무죄한 예수님을 넘겨주었음에도 2년 후에 로마로 소환되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빌라도가 죄 없으신 주님에 대하여 정치적 이익과 신념이 아닌 의롭고 정직한 판결을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가실 때 여러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선한 도구도 있고 악의 도구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성도는 어느 편에 사용될 것인가 생각해보는 한 주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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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3
7:00 AM07:00

그 영광의 실현

요한복음(John) 18:1~40

성경에서 '기드론 시내'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로 삼하15장에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울면서 맨발로 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갔고 다른 한 번이 바로 요18장에서 주님이 십자가로 향하시며 건너는 장면입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너무 치밀하고 완벽했습니다. 다윗의  천재 책략가 아히도벨과 군대 그리고 여론도 반역자들의 손에 넘어갔기에 눈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던 다윗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시자 아히도벨의 눈이 가리워지고 전세를 다윗 편으로 가져오면서 쿠테타는 진압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다윗의 이야기를 가져오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인간의 시각으로 무능하고 초라하고 저주받은 죽음이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면 인류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사건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번 주간도 십자가의 길로 묵묵히 걸어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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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26
9:30 PM21:30

예수님의 중보기도(2)

요한복음(John) 17:6-26

공사역 초기에 주님은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도의 내용과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당신이 기도하시는 장면이나 기도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31군데) 그런데 당신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 전체를 기록한 곳은 요한복음 17장이 유일합니다. 이 주님의 마지막 중보기도는 먼저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셨고 다음으로 핍박 중에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 하셨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전도로 돌아올 미래의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미래의 제자들에게 기쁨에 대해서 거룩과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2천 년 전부터 하나님의 보좌에서 쉬지 않고 제자들과 오늘날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번 주간도 나를 위해서 중보기도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거룩함과 하나됨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매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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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9
9:30 AM09:30

예수님의 중보기도(1)

요한복음(John) 17:1~5

1400년대 말에 레오나드 다빈치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버트 뒤러라는 미술작가를 아십니까? 비록 다빈치에 비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 '기도하는 손'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향(독일) 출신 친구와 같이 그림공부를 하기로 약속하고 도시로 갑니다. 그러나 이 화가 지망생들은 너무 가난하여 같이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뒤러의 친구가 제안을 합니다. 한 사람이 먼저 공부하고 좋은 작가가 되면 그 작품을 팔아 다음 사람을 공부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으로  뒤러가 먼저 공부했고 오랜 시간 후에 작품을 팔 수 있을만큼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친구를 찾아 미술 공부를 시키기 위해 일하는 식당으로 찾았습니다. 그 때 식당 구석에서 뒤러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 저의 손은 이미 노동으로 뒤틀리고 굳어 옹이졌기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릴수 없습니다. 이런 나 대신 알버트 뒤러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또 진실하게 중보기도하는 친구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담은 것이  그의 작품이(기도하는 손) 되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모두 헌신했고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이 이리도 전율과 감동을 준다면, 영원전부터 지금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기도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요? 이 번 주간도 내 안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주님의 기도를 들으며 그 기도를 기억하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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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12
10:30 PM22:30

빼앗길 수 없는 기쁨과 평안

요한복음(John) 16:16~33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너희들이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고 했을 때에 제자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를 눈치 채시고 쉽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제자들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실것이고 그로인하여 제자들은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잠시 후에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주님은 다시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님(예수의 영)을 제자들에게 보내시고 그들 안에 임재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서 보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 제자들 안으로 다시 오시기 때문에 전혀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기뻐할 일이요 세상에게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주간도 근심대신 이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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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5
6:30 AM06:30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

레위기(Leviticus) 10:1~3

선교와 전도는 목적은 같지만 미묘한 구분이 있습니다. 선교(mission)라는 말은 라틴어(mitto-보낸다)에서 왔으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고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  전도(evangelism)는 헬라어 '유앙겔리제스다이(기쁜 소식을 전한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신자에게 전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런 점에서 선교와 전도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고 목적도 동일합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함으로 구원받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차원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행위 구분과 지역적 구분에도 차이도 있습니다. 전도가 불신자에게 복음을 직접 전하는 행위에 국한된다면 선교는 전도보다 더 포괄적으로 교회의 모든 전도활동과 사업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전도는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는 해외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라고 일반적으로 구분합니다. 또한 무조건 해외에서 전한다고 다 선교는 아닙니다. 가령 해외지만 같은 문화와 언어권에 있는 민족을 전할 때는 선교라고 지칭하지 않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선교와 전도의 정의와 구분을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한 주간도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그 귀한 고백을 이웃에게 가족에게 전하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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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28
12:00 PM12:00

성령께서 오시면 하실 일

요한복음(John) 16:5-15

이 번 주간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보내주시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님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보혜사는 친근하게 우리 곁에서 돕고 지키고 위로하는 분이지만 동시에 법정에서 죄인을 무자비하게 고소하는 검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글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에서 '책망한다' 또는 '꾸짖어 바로잡아준다'라고 번역해지만, 실제로 이보다 더 강력한 의미가 포함됩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보혜사 성령님은 세상에 대해서 법정의 검사와 같이 강력하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고발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성령의 검사로부터 고발받게 되는 죄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의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외에 그 어떤 잘못이나 범죄도 죄가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범한 모든 죄가 결국 죄로 간주되어 이에 따라 정죄의 심판을 받는 것은 죄 용서를 가져오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의 보혜사께서 오셔서 죄를 드러내시는 이유를 기억해야합니다.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돌아오라고 회개하라고 간절히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한 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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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21
9:00 AM09:00

세상은 왜 제자를 미워하는가

요한복음(John) 15:18~16:4

예수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재가 두려움이 될 수 없다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께로 떠나시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시고 제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앞으로 일어날 환란과 핍박에  대해서 가감없이 말씀하셨고 현실적인 해결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이 핍박에 대한 예고는 요한복음의 수신자들이 이 책을 받았던 주후 1세기에 가장 혹독하고 격렬하게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게됩니다. 그 진리를 오늘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핍박 앞에 순교는 순간적인 용기와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예고하신 것처럼, 세상의 미움과 핍박은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올 것입니다. 이 마지막 핍박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님의 이 위로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세상이 먼저 나를 미워했기에 너희들도 반드시 미워할 것이다.” 핍박받고 순교했던 성도는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오롯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야말고 고난과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는 한 주간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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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14
6:00 PM18:00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요한복음(John) 15:1~17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로 가시면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당신 자신은 참포도나무이며 제자들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사실이 내용이 성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비유지만 듣고있는 당시 제자들에게는 다소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시80편과 겔15장 그리고 렘2장에 나타난 것처럼,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키는 말이었고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열매 맺지 못하거나 못된 열매를 맺는이스라엘은 더이상 포도나무가 아니며 당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비유는 이런 강력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참 열매를 맺지 못하는 너희들은 스스로 노력해서 열매를 맺으려 하지말고, 주님 당신 안에 붙어있고 거하기만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번 한 주간도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합시다. 그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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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7
6:00 AM06:00

나의 평안을 주노라

요한복음(John) 14:27~31

주님의 떠나심에 대해서 한없이 두려워했던 제자들에게 주님 당신이 떠난 후에 오시는 보혜사 성령과의 관계 안에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단순한 문제의 해결 뒤에 찾아오는 일시적인 평화와 안정이 아니라 영적인 평안이요 내면적인 평안이며 영원한 에수님의 평안입니다. 이런 평안을 고대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가 갈망했습니다. 그는 상상할 수 없는 인력과 천문학적인 재정을 들여서 피라미드를 지었고 사후에 그 안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직사각형 2.5톤의 돌 320만개를 한 치의 오차없이 147미터까지 견고히 올린 건축물이지만, 그 안에는 참 평안과 안식은 없었습니다. 훗 날 고대와 중세시대의 도벌꾼들에 의해 철저히 파헤쳐지고 보물은 도난당했습니다. 세상의 가수들과 문학가들 역시 각각 자신의 노래와 문학 안에 평안이 있다고 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수 김광석씨나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헤밍웨이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영원한 참 평안은 세상의 노력으로 힘으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 그 분과 만나 교제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한 주간도 성령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평안을 누리고 감사하는 성도님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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